아이슈타인에 대한 인물 평가가 새로운 주제로 떠오른다. 마치 에디슨의 자본주의 욕심과 권력에 밀린 테슬라의 예처럼...진정한 과학이란게 존재하는 것일까?
과학도 정치판처럼 힘과 권력, 자본주의의 노예일 뿐인다. 역사를 바라보는 역사관처럼 승리한 자만의 세상인 것처럼......
아인슈타인은 사상 최대의 과학 사기이자 표절자인가??
1905년 그의 네 편의 기적의 논문은 그의 첫 번째 부인 밀레바가 저술했다. 그것들은 1904년 제시아 깁스(Jessiah Gibbs)에 의해 완성된 브라운 운동을 설명하는 논문인 '물질의 운동 이론'이다. 광전 효과 논문은 맥스 플랑크(Max Planck)의 작품이며 필립 레너드(Phillip Leonard)의 실험 연구에 기초했다. 오늘날 특수상대성이론으로 알려진 것은 앙리 푸앵카레(Henri Poincare)에 의해 완성되었다. 1904년 그는 세인트루이스에서 물리학 세계대회의 주 연사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이 모든 결과로부터, 만약 그것들이 확인된다면, 완전히 새로운 역학이 탄생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어떤 속도도 빛의 속도를 능가할 수 없고, 어떤 온도도 절대 영점 이하로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특징으로 합니다. 왜냐하면 물체는 그들의 운동을 가속화하는 경향이 있는 원인에 대하여 관성을 증가시켜 대항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관성은 빛의 속도에 접근했을 때 무한해 질 것입니다.“
역사적인 기록은 적어도 다섯 명의 다른 사람들이 그보다 전에서 '그의' E=mc^2 공식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보여준다. 드 프레토(Olintino De Pretto)는 1902년 또는 1903년 'Ate'라는 과학 잡지에 E=mc^2 공식을 완전히 유도하고 출판했다. 데 프레토 가족은 아인슈타인의 친구이기도 한 미셸 베소(Michele Besso)와 좋은 친구였다. 아인슈타인은 베소가 그의 특수 상대성 논문에 대한 공로를 인정했을 뿐이다.‘
일반 상대성 이론의 장방정식은 데이비드 힐버트에 의해 완성되었고 아인슈타인의 논문을 위해 그의 친구 에르윈 프룬들리히에 의해 복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GR(일반상대성)에 대한 장방정식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으로 알려진 것에서 파생된다. 아인슈타인이 비유클리드 방정식을 완성한 지 16개월 후, 맥스 클라인(Max Klein)이라는 이름의 비유클리드 전문가는 아인슈타인이 비유클리드 논문에서 매우 단순한 오류를 범한 곳이 어디인지를 설명하는 편지를 아인슈타인에게 쓴다. 아인슈타인은 손을 허공에 대고 답장을 쓰면서 그는 실제로 유클리드 기하학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데이비드 힐버트 자신도 아인슈타인의 비유클리드적 능력에 대해 그것은 괴팅겐의 어떤 학교 아이들보다도 더 나빴다고 말한다.
아인슈타인은 1919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빛의 굴절에 대한 관찰 실험 후에 유명해졌다. 동시에 전 세계의 많은 과학자들이 특히 그가 노벨상을 받을 때 분노로 폭발했다. 논란으로 1921년 상은 연기되어서 1922년 상대성이론이 아닌 광전 효과로 수여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정직한 연구자가 아니라, 직업 표절자, 그리고 훨씬 더 많은 사기로 이름 붙여졌다. 놀라운 것은, 오늘날 사람들은 이 스캔들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이 5~7개의 노벨상을 받았어야 했다고 주장한다. 아인슈타인은 1922년까지 노벨상 후보에 62번 올랐다. 그 스캔들은 1923년부터 1955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아무도 감히 아인슈타인을 다시 지명하지 못할 정도로 영향을 미쳤다. 그런 사람은 세계 어디에서도 한 명도 없었다.
아인슈타인 사상 최대의 표절자 상대성 이론 :
아인슈타인은 1905년 그의 특수 상대성 이론과 E = mc^2에 관한 논문에서 여러 명의 저명한 과학자들의 작품을 표절했지만, 물리학계는 지난 세기 동안 그 기록을 바로 세우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의 지지자들은 역사적 기록을 타락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방식으로 행동했다.
타임지의 "세기의 인물"인 알버트 아인슈타인 (1879년-1955년)은 특수상대성 이론에 관한 긴 논문 (실제로는 "동체의 전기역학에 대하여")을 다른 논문들을 전혀 인용하지 않고 썼다. 아인슈타인이 유명한 1905년 논문을 쓰기 전, 그 논문이 제안하는 많은 핵심 아이디어들은 로렌츠(예: 로렌츠 변형)와 푸앵카레(Poincaré)에게 이미 알려져 있었다. 아인슈타인에게 전형적이듯이, 그는 그 이론들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들을 조작했을 뿐이다. 그는 현존하는 지식의 본체를 가지고, 그가 좋아하는 아이디어를 취사선택한 다음, 그것들을 특수 상대성 이론에 대한 그의 기여에 대한 이야기로 엮었다. 이것은 Annalen der Physik의 편집장들과 같은 많은 동료들의 완전한 묵인 하에 이루어졌다. 가장 두드러진 예는 방정식 E = mc^2 이다.
그것은 관습에 의해 1905년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독점적인 영역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물질을 에너지로 그리고 에너지가 물질로 변환하는 것은 아이작 뉴턴 경에게 알려져 있었다 ("큰 물체와 빛은 서로 전환될 수 있다..." 1704). 그 방정식은 아인슈타인 이전에 S. Tolver Preston (1875) 쥘 앙리 푸앵카레 (1900년; 브라운에 따르면, 1967년), 그리고 Olinto De Pretto (1904)에게로 귀속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 E = mc^2 를 정확하게 도출한 적이 없기(Ives, 1952년) 때문에, 이 방정식을 아인슈타인의 독창성과 연관짓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아서 에딩턴이 1919년 일식 자료를 선별적으로 제시하여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을 지지한 것은 20세기의 가장 큰 과학적 속임수 중 하나이다. 아인슈타인에 대한 그의 아낌없는 지지는 역사의 흐름을 타락시켰다. 에딩턴은 이론을 실험하는 것보다 아인슈타인을 과학의 왕으로 옹립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었다.
물리학계는, 자신도 모르게, 일종의 사기나 무언의 음모를 꾸몄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기록과 평판이 초인플레되는 데에도 단순히 방관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이 침묵은 아인슈타인을 지지하는 모든 사람에게 득이 되었다.
도입부
과학은 본질적으로 고립적이다. 일반적으로 화학자들은 화학에 대해 읽고 쓰고, 생물학자들은 생물학에 대해 읽고 쓰고, 물리학자들은 물리학에 대해 읽고 쓴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연구비를 놓고 경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과학자들이 자신들을 위해 더 많은 돈을 원했다면, 그들은 부당하게 경쟁하기로 결정할지도 모른다. 그들이 이것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자금 조달 기관들에게 그들이 과학의 다른 분야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확신시키는 것이다. 자금 조달 기관이 동의하면 나머지 과학에 어려움을 줄 수 있다.
돈을 더 많이 버는 한 가지 방법은 슈퍼히어로 - 아인슈타인과 같은 슈퍼히어로를 만드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지위는 물리학계, 그의 추종자, 그리고 미디어의 산물이다. 각 그룹은 아인슈타인을 아이콘으로 격상시킴으로써 엄청난 이익을 얻는다. 물리학계는 수십억 달러의 연구 보조금을 받고, 아인슈타인의 지지자들은 상당한 보상을 받고, 타임지와 같은 언론사들은 아인슈타인을 "세기의 인물"로 표지에 올리면서 수백만 개의 잡지를 팔게 된다. 스캔들이 터지면 물리학계, 아인슈타인 지지자, 언론은 부정적인 뉴스를 경시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논문 '동체의 전기역학에 관하여'는 20세기 표절의 절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의 노력은 드러날 것이다.
특수 상대성
쥘 앙리 푸앵카레 (Jules Henri Poincaré, 1854년 - 1912년)는 특수 상대성 이론에 중요한 공헌을 한 위대한 과학자이다. 인터넷 철학 백과사전 웹사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푸앵카레는
1. "특수 상대성 이론의 예비 버전을 작성"
2. "빛의 속도는 한계 속도"라고 명시하였다(그의 1904년 논문, the Bull. of Sci. Math. 28). Poincaré는 "빛 속도에 따라 증가하는 관성이 한계가 되고 초과될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역학"을 주장했다.
3. "질량은 속도에 달려 있다"고 제안했으며
4. ("상대성이론의 원리를 공식화했으며, 그 원리에 따르면 어떠한 기계적 또는 전자기적 실험도 균일한 운동 상태와 휴식 상태를 구별할 수 없다."
5. "로렌츠 변환을 유도했다"
Poincaré가 특수상대성이론에 얼마나 깊이 관여했는지는 명백하다.
심지어 케스와니(1965)도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되었다.
"1895년까지만 해도, 혁신가였던 푸앵카레는 절대 운동을 탐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추측했고, "1900년에 그는 '상대운동의 원리'를 도입하고 나중에 그것을 '상대성 법칙'과 '상대성 원리'라는 용어로 불렀으며, 1902년에 출판된 그의 저서 '과학과 가설'에서 '상대성이론의 원리'라고 불렀다.“
아인슈타인은 1905년 그의 참고자료가 없는은 논문을 썼을 때 이전의 이론적인 연구 중 어느 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상대성 이론의 예비 버전을 스케치했을 뿐만 아니라, 푸앵카레는 전체 개념의 중요한 부분, 즉 비고유 시간(local time국소시간)을 다루었다. 그는 또한 특수상대성 이론에 중요한 시계 동기화clock synchronization의 개념을 창안했다. 찰스 노드먼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들은 현재 아인슈타인에게 귀속된 대부분의 것들이 실제로는 푸앵카레에게 공이 돌아가애 한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상대주의자들의 의견으로는 공간을 만드는 측정봉이고, 시간을 만들어내는 시계이다. 이 모든 것은 아인슈타인 시대 훨씬 이전에 푸앵카레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알려졌으며, 그 발견을 그에게 돌리는 것은 진실에 대한 불의를 행하는 것이다.“
다른 과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에 대해 대중만큼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현재 유명한 논문인 1905년 아인슈타인의 또 다른 이상한 특징은 푸앵카레나 다른 사람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입니다,"라고 막스 보른은 내 세대의 물리학에서 썼다.
"그것은 당신에게 아주 새로운 관점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물론 내가 설명하려고 노력한 대로 사실이 아니다." (보른, 1956)
G. 버니스톤 브라운(1967)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일반적인 믿음과는 달리 아인슈타인은 제한적이거나 특수 상대성이론에서 유용한 공식을 도출하는 데 아주 작은 역할을 했을 뿐이며, 휘태커는 그것을 푸앵카레와 로렌츠의 상대성 이론이라고 불렀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이 어떤 집단들에서는 푸앵카레와 로렌츠의 상대성 이론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푸앵카레와 로렌츠가 그것의 생성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인슈타인 논문에서 충격적인 것은 비록 푸앵카레가 세계 최고의 상대성 전문가였지만, 아인슈타인은 그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거나 그가 참고할 만한 일을 했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푸앵카레는 1904년 9월 대중 연설에서 특수상대성이론에 대해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언급을 했다.
"이 모든 결과로부터, 만약 그것들이 확인된다면, 완전히 새로운 역학이 일어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어떤 속도도 빛의 속도를 능가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의해 특징지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체는 운동을 가속화시키려는 원인에 대해서 관성 증가로 대항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관성은 빛의 속도에 접근했을 때 무한이 될 것입니다.”
평행이동하는 자신을 끌어갈 수 없듯이, 그는 어떤 겉보기 속도도 빛의 속도를 능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이 관찰자가 고정 관찰자와 같은 시계를 사용하지 않고 실제로 '현지 시간(비고유시간)'을 표시하는 시계를 사용한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이것(즉 광속을 넘는 것)은 모순이 될 것이다. ."(Poincaré, 1905)
표절자 아인슈타인
이제 아인슈타인이 어떤 자였는지에 대한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할 때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표절자였다. 그는 남의 작품을 훔쳐서 자기 것으로 제출하는 것에 대해 거리낌이 거의 없었다. 이것이 고의였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로널드 W. 클라크의 <아인슈타인 생애와 시대> 구절을 들어보라. (여기에는 Poincaré에 대한 참조가 없다. 의미 없는 인용구 몇 개만 있다.)
101페이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체의 전기역학에 관하여'는 여러 면에서 지금까지 쓰여진 가장 주목할 만한 과학 논문 중 하나이다. 형식과 스타일에서도 그것은 가장 진지한 논문에 무게를 주는 주석과 참고문헌이 결여되어 있어, 이례적이었다.!".
왜 아인슈타인은 특허 사무원으로서의 훈련을 받은 자가 특수상대성이론에 관한 그의 글에서 참고문헌을 인용할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았을까? 누군가는 아인슈타인이, 초보자로서, 덜 참조하기 보다는, 지나치게 참조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분명히 참고문헌이 없는 긴 원고에 직면했을 때 편집자는 다소 더 높은 기준을 적용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을까? 분명히 그것이 Annalen der Physik에 출판되었을 때 품질 관리에 대한 시도는 없었다.
대부분의 유능한 편집자들은 그 논문을 읽지도 않고 거절했을 것이다. 최소한 편집자는 아인슈타인의 선취권 주장이 정확한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문헌을 연구할 것으로 예상할 것이다. 막스 보른은 말한다
“주목할 점은 그것에는 이전 문헌에 대한 언급이 단 한 건도 없다는 점이다.”(보른, 1956년)
그는 언급의 부재가 비정상적이고 심지어 20세기 초반의 기준에서도 이것이 가장 특이하고 심지어 전문가답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표절 혐의를 피하기 위해 비틀고 돌렸지만, 이것들은 투명했다. Bjerknes (2002년)에서 우리는 제임스 맥케이 (James MacKaye)로부터 다음 구절을 배은다.
"아인슈타인의 설명은 로렌츠의 설명에 대한 차원 위장이다."
따라서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로렌츠의 이론에 대한 부정도, 대안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그것의 복제이고 위장일 뿐이다. 아인슈타인은 로렌츠 이론이 옳다고 계속 주장하지만, 그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므로,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로렌츠의 이론의 위장일 뿐, '해석'에 대한 명백한 불일치가 단어만의 문제라는 것이 명확하지 않은가?"
Poincaré는 철학, 수학, 물리학에 관한 30권의 책과 500편이 넘는 논문을 썼다.
아인슈타인은 수학, 물리학, 철학에 대해 썼지만, 그는 푸앵카레의 물리학에 대한 공헌을 결코 읽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푸앵카레의 많은 생각들 - 예를 들어, 빛의 속도는 한계이고 질량은 속도에 따라 증가한다는 생각들– 은 아인슈타인의 논문, "동체의 전기역학에 관하여"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이 그의 논문을 쓰기 위해 로렌츠와 푸앵카레의 거의 모든 문헌을 도용한 행위는 표절의 기준을 높였다. 정보화 시대에 이런 식의 표절은 결코 무한정 행해질 수 없지만, 물리학계는 여전히 기록을 바로 세우지 못하고 있다. 1907년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표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제가 보기에 뒤에 이어지는 것들은 과학의 특성상 이미 다른 작가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해결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 있는 문제들이 새로운 관점에서 다루어졌기 때문에, 나는 문헌에 대한 철저한 현학적인 조사를 빼놓을 권리가 있다.."
이 진술로 아인슈타인은 적절하게 포장된 표절은 받아들일 수 있는 연구 도구라고 선언했다. 다음은 불가분의 출처인 웹스터의 제2판, 제2판, Unabrided, 1947, 페이지 1,878의 표절의 정의이다.
"도둑질을 하거나 절취해서 자기 것으로 치부하는 것(상대의 생각, 말, 예술적 연출 등);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 표현 또는 생산물을 적절히 밝히지 않고 사용하는 것. 표절을 저지르다."
이게 바로 아인슈타인이 한 짓 아닌가?
정당한 공을 돌리는 것은 시의성과 적절성의 두 가지 측면을 포함한다. 사실 30년 후에 로렌츠가 특수상대성이론의 기초를 제공했다고 세계에 말하는 것은 시기도 안 맞고 적절하지 않으며(아래 참조), 정당한 공을 돌리는 것이 아니다.
로렌츠의 공헌과 관련하여 아인슈타인이 사후 사실적으로 쓴 어떤 것도 근본적인 표절행위를 변화시키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의 표절의 실체는 그의 1935년 논문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성의 기초적 유도"에 나타나 있다. 거기서 맥스웰을 토론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특수 상대성 이론의 진짜 기초인 로렌츠 변환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관계들의 독립성에 대한 의문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심지어 로렌츠 변환이 그의 1905년 논문의 진짜 기초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가 표절자라는 주장을 의심하는 사람은 누구나 한 가지 간단한 질문을 해야 한다.
"아인슈타인은 무엇을 알았고 언제 그것을 알았을까?" 아인슈타인은 어디에나 있는 부수적인 표절이 아닌 계획적인 표절을 했다.(무디, 2001)
E= mc^2의 역사
누가 물질이 에너지로 , 에너지가 물질로 변환된다는 개념을 시작했나? 그것은 적어도 아이작 뉴턴 경(1704)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브라운(1967)은 다음과 같은 진술을 했다.
"따라서 1900년 푸앵카레에 의해 일반적인 증명 없이 제안된 공식 E = mc^2 가 점차 생겨났다."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아인슈타인이 E = mc^2 방정식을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다음 질문은 "누가 그랬는가?"라는 것이다.
Bjerknes (2002)는 S. Tolver Preston일지 모른다고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는 ”1870년대 공식 E = mc^2에 기초하여 원자에너지, 원자 폭탄과 초전도성을 공식화했다.
Preston 외에도 E= mc2 역사에서 큰 공을 받을 사람은 Olinto De Pretto(1904)이다.
이 시기가 극히 의심스러운 까닭은 아인슈타인이 이탈리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탈리아 물리학자들이 쓴 논문을 검토하고 있었고 그의 가장 친한 친구는 스위스계 이탈리아인인 미셀 베소(Michele Besso)였다.
분명히 아인슈타인은 그 문헌들에 접근했을 것이고 그것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E = mc^2은 "이탈리아의 아이디어였다" (Carroll, 1999)에서, 우리는 De Pretto가 E = mc^2 공식 면에서 아인슈타인을 앞섰다는 명확한 증거를 보았다. 적은 양의 질량으로 방출될 수 있는 방대한 양의 에너지를 이해한다는 점에서 프레스턴(1875)은 아인슈타인이 태어나기 전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Preston은 분명히 자신의 작업에 E = mc^2 공식을 사용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한 알갱이가 10만 톤의 물체를 1.9마일 높이까지 들어올릴 수 있다고 판단한 값이 E = mc^2 방정식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아이브스(Ives)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이 E = mc^2 공식을 유도할 때 그는 그가 가정한 것을 증명하려고 했기 때문에 E = mc^2라는 공식의 유도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이 도출한 방사성 붕괴 방정식의 부주의한 처리와 비슷하다. 아인슈타인이 운동학과 역학을 섞어서 중성미자가 튀어나온 것으로 밝혀졌다. 중성미자는 아인슈타인에 의해 우연히 만들어진 신화적인 입자일 수 있다(Carezani, 1999)..
중성미자와 관련하여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다: 적어도 40개의 다른 종류가 있다. 또는 0개의 종류가 있다. 오캄의 면도날이 규칙이다.
1919년 일식
1919년 5월 29일 열대지방에서 일어난 일보다 더 명확한 과학적 사기는 있을 수 없다.
특히 분명한 것은 에딩턴이 일식 데이터를 조작하여 결과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 연구에 부합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Poor(1930), 브라운 (1967), 클라크 (1984), 맥커슬랜드 (2001)는 모두 이 일식을 둘러싼 문제들을 다룬다.
프린시페 팀이 포착한 개기일식 사진 [영국 왕립천문학회 홈페이지 보도자료 캡처]
소브랄(Sobral)과 프린시페(Principe) 탐험을 그렇게 의심하게 만든 것은 에딩턴이 아인슈타인을 열렬히 지지했다는 것이다. 그의 진술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국립 천문대는 '적' 이론을 검증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써 최고의 과학 전통을 살렸습니다."(클라크, 1984년)
이 예에서 에딩턴은 과학의 기본 교리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그의 일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사기에 대한 추가 증거는 Eddington 자신의 진술과 Clark에 의해 제공된 그것들에 관한 소개에서 추론할 수 있다(iid, 페이지 285).
"5월 29일은 폭우와 함께 시작되었는데, 폭우는 정오 무렵에 그쳤다. 이미 일식이 시작된 오후 1시 30분이 되어서야 그 일행은 태양을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우리는 믿음에 의지하여 사진 프로그램을 수행해야 했다...'"
에딩턴은 그의 진정한 편견을 드러낸다: 그는 아인슈타인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기꺼이 하려고 했다. 그러나 에딩턴은 단념할 수 없었다.
"프린시페 원정대에 관한 한 그 노력은 중단되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매일 밤 밤마다 두 번씩 일식 후 6일 밤 동안 사진을 현상했다.
흐린 날씨 때문에 계획에 차질이 생겼고, 제가 의도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조치를 취해야 했습니다. 그 결과 저는 결과에 대한 어떤 사전 발표도 할 수 없었습니다."(클라크, Ibidd.)
사실, Eddington의 말은 결과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과 일치하는 일말의 증거를 발견하자마자 그는 즉시 그것을 이론의 증거로 선언했다. 이것이 과학인가? 에딩턴이 그의 발견을 발표했을 때 천문학자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에딩턴 말고 그 사진판을 본 사람이 있었나? Poor 가 그랬고, 그는 에딩턴의 발견을 완전히 부인했다. 다음은 Poor의 요약에서 인용한 몇 가지이다.
아인슈타인이 태양의 가장자리를 지나는 광선에 대해 1.75초의 편향을 계산한 수학 공식은 잘 알려져 있고 간단한 물리 광학 공식이다.
" 변하는 시간, 뒤틀리거나 뒤틀린 공간, 동시성, 또는 운동의 상대성 이론의 근본적인 개념 중 하나도 아인슈타인의 빛의 편향에 대한 예측 또는 공식에 어떤 식으로든 관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많고 정교한 일식 탐험은 가공의 중요성을 부여받았다. 그들의 결과는 상대성 이론을 증명하거나 반증할 수 없다."(Poor, 1930년).
브라운(1967년)으로부터, 우리는 에딩턴이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확인되었다는 것을 세계 사회에 알리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을 안다.
에딩턴이 이것의 기초로 한 것은 사진판에 대한 조기 평가였다. 처음에는 아인슈타인이 주장하는 것처럼 항성이 구부러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브라운에 따르면, 그 다음에는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여러 개의 항성이 예상한 방향을 가로질러 구부러지는 것이 관찰되었고, 다른 항성은 상대성이론에 의해 예측된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구부러지는 것이 관찰되었다.
1919년 일식 때 수집된 데이터의 불합리성은 Poor(1930년)에 의해 증명되었는데, Poor(1930년)는 이 데이터의 85%가 "우발적 오류"로 인해 남미 일식으로부터 폐기되었다고 지적했는데, 즉 그것은 아인슈타인의 척도 상수와 모순되었다.
이상한 우연의 일치로, "좋은" 데이터의 15%는 아인슈타인의 척도 상수와 일치했다. 어찌된 일인지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부합하지 않는 별들은 일시적으로 보류되었고, 신화는 시작되었다. 그래서, 몇 개의 모호한 데이터 포인트들에 기초해서, 아인슈타인을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200년의 이론, 실험, 그리고 관찰이 버려졌다. 그러나 에딩턴에 의한 불신되는 실험은 스티븐 호킹(1999)에 의해 여전히 복음으로 인용되고 있다.
호킹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곡면 시공간 이론의 새로운 이론은 일반 상대성 이론이라고 불렸다. 1919년 영국의 서아프리카 원정이 일식 중 태양 가까이 별의 위치가 약간 바뀌는 것을 목격했을 때 그것은 화려한 방식으로 확인되었다. 아인슈타인이 예언했던 것처럼, 그들의 빛은 태양을 지나갈 때 휘어져 있었다. 여기 공간과 시간이 뒤틀렸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있었다."
호킹은 정말로 고베 쇠고기의 한 면보다 더 철저하게 마사지를 받은 소수의 데이터 포인트가 2세기 동안 산성 조사를 통해 살아남은 패러다임을 타도하는 기초가 된다고 믿고 있는가?
그러나 실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아인슈타인은 이 모든 일일 발생할 때 어디에 있었는가?"
분명히, 그가 1935년 논문을 썼을 때, 그는 Poor의 작품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 별의 변위는, 실제로 존재한다면, 예측된 아인슈타인 굴절과 조금도 닮지 않았다. 그것들은 방향, 크기, 태양으로부터의 거리에 따른 감소 속도와 일치하지 않는다."
왜 그는 그의 연구에 정면으로 모순되는 논문에 관해 기록하고 발표하지 않았을까? 왜 아인슈타인의 추종자들은 1919년의 가짜 데이터에 대해 기록을 바로 세우려고 하지 않았을까?
이것이 그렇게 의심스러운 이유는 계측기와 물리적 조건 둘 다 매우 정밀한 측정을 하는데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2년 영국 정밀 물리학 연구소의 인터넷 기사에서 지적했듯이, 탐험에 사용된 캡 카메라는 1/25 도만 정확했다.
이것은 단지 캡 카메라 불확실성에 대해 에딩턴이 정확한 값의 200배 이상의 값을 읽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McCausland (2001)는 전 네이처지 편집장 John Maddox의 말을 인용했다.
"그들 [크롬멜린과 에딩턴]은 빛의 굴절을 측정하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잘 기록되지 않은 것은 1919년의 측정치가 특별히 정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19년 상대성 이론에 대한 실험적인 증거가 매우 허술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의 엄청난 명성은 그대로 남았고 그의 이론은 그 이후로 인간 사상의 가장 높은 업적 중 하나로 여겨져 왔다.”
처음부터 에딩턴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실험하는 데 전혀 관심이 없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단지 그것을 확증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에딩턴이 아인슈타인을 부각시키기로 한 결정의 동기부여 요인 중 하나는 두 사람이 비슷한 정치적 성향을 가졌다는 것이다: 평화주의.
에딩턴이 아인슈타인을 극력 지지하는 데 정치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음을 시사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질문만 하면 된다.
"아인슈타인이 매파였다면 에딩턴이 그렇게 빨리 아인슈타인을 지지했을까?"
이것은 한가한 관찰이 아니다. 에딩턴은 위대한 평화 중재자로서 그의 역할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과 독일 과학자들을 통합하기를 원했다. "적" 이론가인 아인슈타인을 높은 지위로 격상시키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는가? 평화 중재자가 되고자 하는 열망 속에서 에딩턴은 진정한 과학자의 본질적인 태도인 근본적인 객관성을 잃었다. 에딩턴은 과학자가 되는 것을 그만두고 아인슈타인의 옹호자가 되었다. 에딩턴과 다른 사람들에 의한 명백한 데이터 왜곡은 과학 과정의 노골적인 전복이며 한 세기 동안 과학적 연구를 잘못 이끌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마도 20세기 과학의 가장 위대한 속임수로서 필트다운인(Piltdown man), 1911∼1915년에 영국 잉글랜드 서식스(Sussex)의 필트다운 하상 퇴적지에서 발견된 두개골편 및 하악골편에 붙인 명칭, 나중에 인조물임이 밝혀짐)을 능가할 것이다.
BIPP가 물었다.
"이것이 세기의 속임수였나?"라고 말하며 소리쳤다. "영국왕립학회의 1919 일식 상대성 보고서는 80년 동안 세계를 속였다!!"
맥커슬랜드는 이렇게 말했다.
“저자의 생각으로는 1919년 11월 아인슈타인의 일반이론이 결정적으로 확인된 것을 자신 있게 발표한 것은 흔히 묘사되는 것처럼 과학의 승리가 아니라 20세기 과학사에서 가장 불행한 사건 중 하나였다.”
1919년의 일식이 아인슈타인을 만들었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데이터가 조작되고 일반 상대성에 대한 지원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룻밤 사이에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 역사 왜곡은 80년 넘게 알려져 왔지만 여전히 스티븐 호킹이나 데이비드 레비 같은 사람들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다.
요약 및 결론
일반 대중들은 과학자들이 윤리의 궁극적인 수호자이며, 과학적 엄격함이 진리의 척도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과학이 인격들에 의해서 어떻게 수행되는지 깨닫는 자들은 거의 없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과학적 의례 이상의 존재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규칙을 어기고 그것을 회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충분히 오래 참으면 그의 적들이 죽고 그의 추종자들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에서는 마지막 남은 추종자가 승리하고 역사를 쓰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경우 표절에 대한 그의 노골적이고 반복적인 집착은 거의 잊혀지고 그의 추종자들은 다른 과학자들의 발견으로부터 반복적으로 빌려서 아인슈타인의 후광을 장식하는데 사용했다. 아인슈타인의 명성은 다리가 셋인 걸상에 의해 지탱된다.
• 한 다리는 아인슈타인의 표절이다. 그는 표절자였나?
• 두 번째 다리는 물리학 공동체이다. 그들은 아인슈타인에 대해 무엇을 알았고 언제 그것을 알았을까?
• 세 번째 다리는 매체이다. 아인슈타인에 관한 한 그것들은 진실의 도구인가 아니면 속임수의 도구인가?
시간만이 말해줄 것이다. 물리학계는 또한 세 개의 다리가 달린 걸상에 의해 지탱된다.
• 첫 번째 다리는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이다.
• 두 번째 다리는 저온 핵융합이다.
• 세 번째 레그는 자동역학autodynamics이다.
다리가 셋인 걸상의 가장 큰 문제는 한쪽 다리만 톱질하면 걸상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물리학이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예측이 가능한 아주 중대한 분야에는 적어도 세 가지가 있다. 과학은 다리가 여러 개인 걸상이다.
• 한쪽 다리는 물리학이다.
• 두 번째 단계는 지구 과학이다.
• 셋째 다리는 생물학이다
• 네 번째 화학이다 (예: 저온 핵융합)
논쟁을 위해 물리학이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요? 과학이 무너질까?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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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인용 사이트>
https://m.blog.naver.com/saranmul/222297997271
https://www.quora.com/profile/Anthony-McAuliffe-6
'> 우주, 물리, 양자역학,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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