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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인가?, 과정과 실재, 데카르트, 존재론, 과학철학, 신, 니체, 명상

FlightSim 2020. 6. 7.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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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이과였던 내가 철학과 문학, 예술에 관심이 많아서 예전에 화이트헤드(Whitehead)가 저술한 '과정과 실재' 라는 책을 학교 다닐때 읽었던 기억이 난다.

(화이트헤드,,흰대가리,,,, Einstein,, ,한돌(一石)...  서양사람 이름도 예전엔 우리나라처럼 돌쇠, 쇠돌이 등 처럼 이름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네 ㅎㅎ)

도저히 그 당시는 무슨 말인지 이해도 안되고, 용어도 어렵고,,,,그냥 책을 읽어야 한다는 책임감같은 것에 사로잡혀서 다 읽긴 했다.. 읽고 난 뒤에 허탈감이 더 심했다. 서양 철학과 문학 및 과학은 설명형이다. 아주 간단한 주제도 1장짜리를 100장에 쓸 수 있다. 그리고 이분법적이다.

 

 

헤겔 (Hegel)의 '변증법 (辨證法)'도 읽었는데,, 독일 철학자들은 이름답게 글도 어렵다. 그 당시는 헤겔의 별명을 해골이라고 하면서 해골이 깨지듯한 독일 철학을 어려워했다 ㅎㅎ

 

 

근데 동양사상은 그걸 한마디로 정리 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

반대로 동양사상은 단순요약형의 단순함에 그 진가를 찾을수 있다. 물론 모든 철학과 사상이 이분법, 일원론으로 구분하기 어렵다. 대체적인 트렌드가 그렇다는 것이다.

 

 

요즘은 과학철학으로 모든 사물과 자연의 이치, 심지어 사회를 우주 물리와 과학철학이라는 관점으로 들여다본다.

 우리가 커서 과학을 가까이 하지 않는 이유는 어려워서가 아니라 어릴때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감성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찌들고 스크래치가 나면서 돈의 노예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생각해봐라.. 어렸을 적엔 개미 한마리의 움직임에 호기심을 느끼며 관심을 가졌고, 물고기 한 마리, 날아가는 새들, 하늘의 구름을 보며 이름을 지었다. 

그런 우리들이 생활의 노예, 돈의 노예가 되면서, 이 세상은 돈이 최고인 것처럼 교육을 받고 자랐다. 물론 돈은 현실사회에게 있어서 어느정도 있어야 한다.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정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일가?를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전철이나 버스에 타보면 이상한 사람? 약간 정신이 나간 사람들을 가끔 볼 수 있는데, 그 사람들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입 밖으로 욕을 해댄다...또한 지하철을 타보면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김정은, 이 개xx, 정은이 이 개xx.....쓉xx" 계속 욕을 하는 할아버지도 자주 본다. 자기 뇌에서 시키는 대로 말은 한다. 본인이 말하고 있는 상황을 알고는 있는건지.. 모두가 쳐다보는 데도 인식을 하고 있는건지 모르겠다.

 

 

근데, 나도 가끔은 내 머리속으로 어떤 안좋은 상황이 닥쳤을 때 마음속으로 욕을 한다. 그러면 정신나간 사람과 나와 뭐가 다를까? 순간,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나의 차이가 뭐지? 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저 사람들은 생각을 입 밖으로 한다는 것과 나는 생각을 머릴속으로 한다는 것 말고 다른 점이 무엇일까? 어차피 머릿속에 생각이 사로잡혀 있는 것은 똑같다.

 

 

 

데카르트 (Descartes, René) 는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Je pense, donc je suis : cogito ergo sum)

"I think, therefore I am - (Ich denke, also bin ich)"

데카르트는 진리를 찾기 위해 평생을 고민했던 사람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완벽한 진리는 무엇일까? 이게 모두 매트릭스처럼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 모든게 환상이 아니라 진짜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근데 사람의 감각은 믿을 수 없다. 사람의 감각은, 차가운 것이 있는데 아주 차가우면 되려 뜨겁다고 느끼기도 하고, 뜨거운 것을 반대로 아주 차갑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렇다면 난 어떤게 진리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과학에서 진리는 1+1은 2라는 사실이다. 이 변하지 않는 완벽한 진리를 양자역학이 되어 원자를 설명하기도 하고, 상대성 이론이 되어 거대한 별을 설명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철학에서도 완벽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걸 이용하여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내가 아무리 모든 것을 부정하고 의심하고 이 세상이 가짜라고 해도 지금 이 순간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인 것이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내가 만약 존재하지 않을면 이런것을 생각할 수가 없다.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은 진짜구나..이렇게....

 

 

그러나 현대과학에 의하면 데카르트는 틀렸다. 우리가 당연하게 믿는 이 생각도 우린 잘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린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뇌로 생각한다. 수많은 신경세포로 이루어진 이 뇌는 신경전달물질이라는 메세지를 보내며 소통한다. 원자들이 원자들을 보내며 원자들과 소통한다는 것이다. 이 원자의 움직임을 우리가 과연 통제가능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1979년 미국의 심리학자 벤자멘 리벳은 아주 유명한 실험을 한다. 

 

 

피험자들에게 버튼을 주고, 원하는 순간에 버튼을 누르도록 한 후, 버튼을 누르려는 의지가 발생하는 순간에 벌어지는 뇌의 활동 측정했다

그 실험결과,

버튼을 누르고자 하는 의지조차 가지기 전에 뇌가 반응하며, 버튼을 누르겠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뇌가 미리 반응하였다

-> 뇌에서 발생한 전기 신호에 의해 우리의 의지가 생성된 것이다.

--> 더 나아가 존-딜론 헤인즈 연구팀은 버튼을 누르기 10초 전에 뇌가 반응한다는 사실을 발견하며 또한 왼쪽과 오른쪽 버튼 중 어느 버튼을 누를지까지 일정 확률 이상으로 예측한다고 한다.

 

 

이 실험 결과 생각해볼 점은, 

뇌 속에서 주체성 없는 물질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우리의 행동이 정해진다면, 자유의지가 개입할 수 있는가? 인정하기 어렵지만, 인간은 그저 생화학적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우린 정말 생각이란 걸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심장처럼 우리 뇌도 내 의지와 생각이 아니라 자동으로 알아서 움직이는 것일까? 우리가 혈액순환을 해라 라고 명령하지 않지만 피는 스스로 흐르고 있고, 소화하라고 명령하지 않고도 위와 대장과 소장은 알아서 스스로가 소화를 하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나는 생각한다 라고 말하는 걸까?

 

 

우리의 몸은 뇌의 전기 신호를 받아 움직인다. 그래서 왼손을 들어 올리는 동작과 관련된 뇌 부위를 자극하면 그 사람의 왼손을 들어 올리게 할 수 있다.

한 실험에서 연구원들은 실험 참가자들의 뇌 부위를 몰래 자극해 왼손을 들어 올리게 한 후 모르는 것처럼 그들에게 왼손을 왜 들어 올렸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그냥 들고 싶어서 들었다", "가려워서 들었다." "무슨 생각이 나서 들었다"  라고 말했다.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해 그 이유를 반대로 갖다 붙이는 것이었다.

 

 

연구를 마친 리벳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느끼는 자유는 이미 뇌에서 일어난 일인 것 같다"  

자유의지란 무엇인가를 의심하게 만드는 말이다. 내가 생각해서 자유의지가 생긴게 아니라, 자유 의지는 정해진 것처럼 실험결과가 나온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이 문장의 오류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 더 틀린 게 있다. 바로 "나".. 나라는 것이 틀렸다니 말도 안되지만, 나를 다시 한번 설명해보자. 나는 이쁘다, 잘생겼다. 키다 크다..못생겼다. 작다. 똑똑하다, 멍청하다, 사교적이다. 수줍다. 다리가 길다, 다리가 짧다 등등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무수하게 많다. 

 

 

그러나 재밌는건 이 모든 표현은 다른 사람이 존해하지 않을 때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존재해야만 이런 표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존해하지 않을면 나에 대핸 절대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모든 건 상대적이니까. 그래서 나를 찾는 여행은 혼자 가면 절대 찾을 수 없다. 나를 상대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사물이나 사람과 같이 있으면서 진정한 나를 찾아야 한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나 할까..

 

 

 

뉴턴과 갈릴레이는 이렇게 말했다. "우주의 배경은 고정되어 있고, 물체가 특정한 방향으로 특정한 속력으로 움직인다."

그런데 수백년 후 아인쉬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다른 물체가 없으면 그 물체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속력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다. 다른 물체가 존재할 때만 방향이 있고 속력이 있는 것이다. 다른 물체가 존재하지 않으면 그 물체의 속력도 방향도 있을 수 없다. 모든 건 상대적이니까.

 

 

이건 물리학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나를 설명할 때도 똑같다. 다른 사람이 없으면 나를 설명할 수가 없다. 다른 사람이 존재하지 않을 때 나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면 나는 정말 존재하는 걸까?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다른 사람이 없으면 나도 있을 수 없다. 그러면 나는 뭘까?

 

 

테세우스 배의 역설이라는 것이 있다. 미노타우르스 라는 괴물을 죽이고 아테네로 귀환한 테세우스. 아테네인들은 그가 탔던 기념비적인 이 배를 수백년 동안 관리하며 보존하다. 그들은 배의 나무판자가 썩으며 새로운 판자로 교체하고, 또 다른 판자가 썩으면 다시 새것으로 교체하면서 계속 보존해 왔다.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계속 낡은 판자를 새로운 판자로 교체하다 보면 어느 순간 원래 배를 만들었던 판자는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할 수 있을까? 만약 테세우스의 배에서 떼어낸 낡은 판자로 다시 다른 자리에서 똑같은 배를 만들었다면 우리는 이 두 배 중 어떤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할 것인가?

 

 

도무지 답을 알수 없는 이 역설을 관점을 바꾸어 쉽게 해결할 수 있다. 테세우스의 배라는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라는 것이다. 이건 모두 나무 판자일 뿐이고, 이렇게 나무판자를 모아 놓은 것에 우리가 테세우스의 배라는 가상의 의미를 부연한 것이다. 테세우스의 배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여기 "나"라는 사람이 있다. 나의 몸은 4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고, 이 세포들은 낡으면 계속해서 새로운 세포로 교체된다. 위산 공격을 받는 위벽 세포는 2~3일에 한번, 몸의 보호막 역할을 하는 피부 세포는 2~3주에 한번씩 교체된다. 이렇게 우리 몸을 구성하는 모든 세포가 다 교체되기까지 약 7년이 걸린다. 7년마다 완전히 다른 몸이 되는 것이다. 나의 7년전 몸과 지금의 몸을 만드는 재료 중 같은 재료는 하나도 없다. 테세우스의 배를 이룬 나무팜자가 모두 교체된 것처럼 나를 이룬 세포도 모두 교체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왜 나를 나라고 믿을까? 내가 이 세포들에 가상의 의미를 부여한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모두 "국가" 라는 가상을 만들고 "돈"이라는 가상을 만들고, "회사"라는 가상을 만들었어도,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만든 가상이라도 가상은 가상이다. 그리고 내가 나 혼자 동의한 이 가상도 가상이다. "나"라는 개념은 우리가 만들어낸 궁극의 가상인 것이다. 어린아이는 어렸을 때 나라고 얘기를 안하고, 예를 들어, "철수는 저거 싫어요"라고 제 3인칭의 시점으로 얘기한다. 아직 "나"라는 가상이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어릴쩍부터 사람들이 자신을 "철수"라고 부르니까 아 이게 철수인가 보다라고 하고 철수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린 모두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이 "나"라는 개념은 첨엔 존재하지 않았다. 우주는 138억 년 전에 엄청난 폭발 (빅뱅)과 함께 탄생했다. (개인적으로는 빅뱅이론은 틀렸다고 보지만, 아직까지는 그나마 정설이고 하니...), 우주 초기 원자들은 서로 부딪히고 튕기면 자동으로 움직였는데, 그런 원자들이 합치고 부딪히고, 이합집산을 무한히 반복하면서 어느 순간 "뇌"라는 물질을 만들었고, 그 "뇌"라는 물질이 생각을 한다. 그게 "나" 다.

인류는 기원전 500년부터 기원후 1500년까지 무려 2천년동안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오래된 사람들이 했던 말을 인류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2천년 동안 믿은 것이다. 그러다 1543년 처음으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때가 바로 르네쌍스였다. 신을 그리던 화가가 인간을 그리고, 신을 쓰던 작가는 인간을 쓰고, 신을 표현하던 시인이 인간을 표현하기 시작한 대격변의 시기로, 세상을 더 이상 신의 눈으로 보지 않게 되자 그 동안 보이지 않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신이라는 가상을 내려놓고 지구가 돈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가 "나"라는 가상을 내려놓으면 어떤게 보일지 모른다. 우리를 가르친 모든 성인군자들은 명상을 좋아했다. 명상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명상은 생각이라는 것을 한발짝 뒤에서 제3자가 되어 관찰자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명상은 나의 뇌가 하는 말을 제3자의 입장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의식, 단 하나가 남는다. 외부 세상과 이 몸뚱아리를 경계 짓던 "나"라는 가상이 사라지고 경계를 짓지 않는 의식만 남는 것이다. 이러 때 사람들은 내가 무한하다라는 것을 느끼고 우주와 하나가 된 느낌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성인군자들은 이런 말을 한다. "너와 나는 하나라고, 우리는 모두 같다고, 내가 우주고, 우주가 나라고, 내가 신이고, 신이 나라고, 너가 나고, 내가 너고"

 

 

신을 버리자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를 버리면 다 보인다. 왜나면 원래 난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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